도면과 사진 그리고 문헌자료를 찾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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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면과 사진 그리고 증명 가능한 문서’
성산포 피난교회를 도등록문화재로 등록하는데 필요한 자료다. 어쩌면 문화재 등록신청서 작성을 위해 소유주를 설득하는 것은 차후의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제든 등록할 수 있도록 자료를 갖춰 놓을 필요가 있다. 따라서 이제 취재 방향을 피난교회의 역사적 가치를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문헌자료를 찾는데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베이스캠프인 성산교회로 돌아가기 전, 인근의 카페에 들러 이제까지 취재한 내용을 정리하기로 했다. 먼저 강관규 장로와 한공숙 장로 그리고 부금현 집사(이상 성산교회)를 만나 성산포 피난교회의 초창기 모습과 발전사를 비롯해 현재의 자리로 이전하기까지의 과정을 상세하게 들었다.
또한 김태자, 장광자, 현춘홍 어르신 등 마을주민을 만나 피난교회가 이곳 지역사회를 위해 어떤 역할을 했는지 확인했다. 이런 내용은 문화재로 등록되기 위해 “지역의 역사·문화적 배경이 되고 있으며, 그 가치가 널리 알려진 것”이어야 한다는 <문화재등록법>의 요구를 충족하고 있다. 아마도 어느 때인가 문화재 등록신청서를 접수하면 문화재위원들이 현장인 성산포 일대 주민들을 방문해 기자가 했던 질문처럼 ‘피난교회가 여러분에게 어떤 일을 했습니까?’ ‘피난교회는 여러분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라는 물음을 던질 것이다.
그러면 어르신들은 피난교회 성도들의 헌신을 떠올리며, ‘아가리배에서 내린 천사들이 죽어가던 사람들을 살렸습니다’ 하고 기자에게 했던 것과 같은 대답을 들려줄 것이다. 기자는 그런 순간이 왔을 때 하나님께서 문화재위원들의 마음에 넉넉한 감동을 주시길 간절히 기도한다. 피난교회가 문화재로 등록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재림교회가 전란의 역사 속에서도 선한 이웃으로서 한민족을 끌어안았음을 알게 되길 바라기 때문이다.
세계유산본부 주무관의 설명에 따르면 제주도에는 가톨릭의 발자취가 많이 남아있다고 한다. 다시 말해 가톨릭으로부터 받은 도움의 흔적이 아직도 깊게 새겨 있다. 그러고 보니 성산교회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도 성당이 넓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 성당의 너른 잔디밭에 서면 성산일출봉이 한눈에 들어온다. 반면, 제주도의 근현대사에서 기독교나 교회가 등장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세계문화유산 주무관에게 피난교회를 소개했을 때 “성산 쪽에 그런 유산이 있는지 처음 알았다”며 사실이라면 매우 소중하고 흥미로운 유산이 될 것이라고 했을 정도다.
[대법원 선고 위해 기도할 수 있는 날 .. D-2]
취재 과정에서 얻은 정보와 인상을 종합해 봤을 때, 피난교회가 성산포 지역의 역사·문화적 배경이 되는 것은 확실해 보였다. 그리고 당시 피난교회의 모습과 받았던 도움을 기억하는 주민들도 상당수 생존해 있으며, 필요하다면 더 많은 자료를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됐다.
그렇다면 이제 도면과 사진 그리고 증명 가능한 문헌을 찾아야 한다. 피난교회가 문화재로 등록되기 위한 첫 번째 조건 중 하나가 “건설·제작·형성된 후 50년 이상이 지나야 한다”는 것. 이를 증명하기 위해 사진만큼 중요한 자료도 없을 것이다. 보통의 교회 생활을 생각해보면 전도회나 사경회, 성경학교, 침례식, 야영회 등 큰 행사를 마치면 기념사진을 찍기 마련이다. 전 삼육대 신학과 오만규 교수가 쓴 <한국 재림교회 100년사> 112쪽 ‘제주도 성산포 피난생활’ 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재돼 있다.
“교회당이 신축된 이후 인접 마을에서 여러 구도자들이 발생하여 7월 3일에는 성산포에서 32명이 이제명 선교사의 주례로 침례를 받았고, 7월 28일에는 고성리, 신양리의 구도자들 36명이 합동으로 침례를 받았으며 같은 날 오조리에서도 김명길 목사의 주례로 6명이 침례를 받아 모두 72명의 새 신자가 발생했다. 1951년 8월 1일부터 7일까지 피난교회 성산포에서 적십자 구급 강습회가 개최되어 59명이 강습을 받았는데 수료식 때 이 중에 9명이 강사증을 받았고 나머지 50명은 일반증서를 받았다. 피난교회 청년선교회는 향상급 마크 수여식을 거행하였으며 청년선교회 찬양대는 제주읍 방송국의 찬양 프로그램에 출연하였다”
피난교회가 세워진 1951년에만 이처럼 다양한 행사가 개최됐다. 그렇다면 이 행사 당시에 찍은 사진이 존재할 수 있을 것이란 게 기자의 짐작이었다. 물론 마음 한쪽에서는 ‘그 전쟁통에 카메라가 있기나 했을까’ ‘바닷가에서 침례식을 했을 텐데, 그러면 교회 건물이 사진에 나올 리도 없고 소용없는 것 아니야?’ ‘사진이 있다 한들 그게 50년 전 사진이라는 건 어떻게 증명할 거야?’ 같은 여러 부정적인 생각이 맴돌았다. 하지만 지금은 소용없다는 생각보다, 어떻게든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필요했다.
기자가 직접 사진을 찾아 나서기에는 물리적 시간이 부족했다. 그래서 결국 제주대회 성도들의 네크워크를 활용하기로 했다. 어디를 가든 재림교회는 하나의 교회로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를 넘어 해외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니 오히려 나라 밖에서 더 강력하게 힘을 발휘하는 재림교회의 장점이다. 이 부분은 기자가 연락을 돌리기보다는 마승용 목사(성산교회)에게 부탁하는 편이 훨씬 빠를 것 같았다.
다음으로 도면과 문헌자료를 찾아야 한다. 도면은 확률은 희박하지만, 교회에서 보관하고 있을 수도 있다. 이 부분은 강관규 장로에게 문의하면 금방 알 수 있을 터였다. 세계유산본부 측 주무관은 도면의 경우 소실된 경우가 많아 없어도 문화재등록절차를 진행하는데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 도면을 찾는 것보다는 문헌자료를 찾는데 시간을 더 할애하는 게 효율적일 것 같았다.
문헌자료는 피난교회가 설립된 지 50년 이상 됐으며, 지역사회에 끼친 영향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이라야 한다. 피난교회의 직원회 회의록이라든지, 호남합회 행정위원회 결의내용을 문화재위원회에서 인정할지는 미지수다. 법인실에 문의해서 해당 문서의 효력을 알아보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확실한 ‘증거자료’가 필요했다.
그렇다면 지방자치단체에서 발행한 문서를 찾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결국 서귀포시청에 다시 찾아가야 할지도 모르겠다. 문서를 찾을 수만 있다면, 피난교회에 역사를 증명할 수 있다면 열 번이든 스무 번이든 찾아가면 될 일이다. 어느덧 창밖으로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베이스캠프로 복귀하기로 했다.
대신 조금 돌아서 가기로 했다. 문득 세월의 부침에도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피난교회가 보고 싶었다. 골목을 지나 기자의 눈에 들어온 피난교회는 이전보다 조금 더 커진 인상이었다. 밤이라 착시가 생긴 걸까. 아니면 전보다 심적으로 가까워진 까닭일까. 크고 또렷해진 피난교회를 담아두고 싶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돌아서 베이스캠프를 향해 걸었다.
* 이 기사는 삼육대학교와 삼육서울병원의 지원으로 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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