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120주년 기념] 권태건의 내러티브 리포트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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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호 목사에게 성산포 피난교회를 유적지로 지정하는 방법에 대해 자문을 구했다. 그는 최대한 자세하게 설명했다.
오조마을 길목에 선 기자는 그 자리에 서서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그의 이야기를 쉴새 없이 받아 적었다.
전 호남합회장 김재호 목사를 만난 것은 지난해 11월 초 호남합회 도농나눔축제 현장에서였다. 김 목사는 성산포 피난교회를 되찾는 방법 가운데 하나로 피난교회의 ‘유적지화’를 제안하기도 했다.
일제의 핍박에 항거해 집단을 이루며 숭고한 신앙을 지켰던 한반도 유일의 집단 신앙공동체인 적목리 유적지가 가평군 향토문화재(제13호)로 지정된 것처럼 말이다.
행사가 진행되는 호남삼육중고 운동장 구령대에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김 목사는 아직도 되찾지 못하고 있는 피난교회의 현실에 안타까운 마음을 여러 차례 드러냈다. 무엇보다 비용적인 측면이 부담되는 상황이라면 피난교회를 유적지화 하는 방안을 마련하는 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의견을 피력했다.
만일 피난교회가 유적지로 지정된다면 ‘문화재보호법’에 의해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보존 등에 필요한 경비를 보조할 수 있”으며 “사적 지정과 더불어 사적 지정 구역 외 일정 지역을 보호구역으로 지정”할 수 있게 된다. 정부의 도움을 받아 피난교회를 보존할 수도 있으며, 관련해 발생하는 비용도 지원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이 만만치는 않다.
“유적지로 지정받기 위해서는 역사적 사료를 철저하게 준비해야 합니다. 물론 지자체에서 조사관들이 파견되겠지만 우리 쪽에서도 충분한 자료를 갖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제출해야 하는 자료도 무척 많을 겁니다. 따라서 유적지 등록에 필요한 절차를 비롯해 어떤 사료를 준비해야 하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기도하며 응원하겠습니다”
지난 며칠간 부복수 집사, 한공숙 장로, 강관규 장로(이상 성산교회) 등 성도들은 물론 오조마을에서 피난교회를 기억하는 어르신들을 만나 피난생활 당시 피난교회의 도움과 역할을 들을 수 있었다. 또한 교회를 매각하게 된 상황에 대해서도 파악했다. 그 과정에서 피난교회가 가진 역사적 의미가 분명해질수록 ‘과연 피난교회를 어떻게 되찾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함께 커져갔다. 그리고 결국 유적지화가 피난교회를 회복하는 또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따라서 앞으로의 취재 방향도 분명해졌다.
피난교회의 유적지화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피난교회가 유적지로 지정될 가능성이 있는지, 다시 말해 유적지로 지정될 수 있는 조건을 갖췄는지가 중요했다. 먼저 재림교회 내에는 ‘적목리 신앙유적지’라는 귀중한 선례가 있었다.
1999년 12월 31일 ‘경기도 가평군 향토유적’으로 지정된 적목리 신앙유적지는 일제강점기의 생활상을 담고 있다. 시기적으로 6·25전쟁 이전이기 때문에 성산포 피난교회에 비해 더 오래된 유적이다. 관계 법령을 살펴보면 생성된 지 적어도 50년은 지나야 할 필요가 있다. 피난교회가 세워진 때는 1951년이므로 무난하게 첫 관문은 통과할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이것은 전부 기자의 판단으로 등록여부를 심사할 위원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알 수 없었다.
김재호 목사의 조언에 따라 피난교회가 행정적으로 소속돼 있는 서귀포시청의 담당 주무관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이 실제적이고 효율적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그래서 인터넷으로 서귀포시청 조직도를 찾았다. 문화예술과를 클릭하고 각 주무관의 책임업무를 살폈다. 스크롤을 내리며 해당 사안을 살피던 중 한 주무관이 △지역문화유산 기초조사 추진 △향토유산 지정 확대 추진을 맡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통화 중이었다.
이후 3차례 더 전화를 걸었으나 여전히 통화가 연결되지 않았다. 내친김에 그냥 바로 찾아갈까 하고 시계를 보니 오후 4시가 가까운 시각이었다. 성산에서 서귀포시청까지 가는 시간을 고려하면 아무리 빨리 가도 퇴근하는 주무관을 붙잡아 세우게 될 공산이 컸다. 몇 번 더 전화를 해 보고 다음 날 찾아가 보는 것으로 마음을 먹고, 다시 전화를 걸었다. 서너번 통화를 시도했을 즈음 드디어 전화가 연결됐다. 하지만 담당자는 자리를 비운 상태였고, 옆자리의 직원이 당겨받은 것이었다.
사정을 상세히 설명하고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냐고 물었다. 상대는 “쪽지를 남겨 두고 연락드릴 수 있도록 하겠다”고 답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전화는 오지 않았다. 시계를 들여다보니 이미 오후 6시가 다 된 시각이었다. 결국 회신을 포기하고, 다음날 직접 찾아가 보기로 했다. 그날 밤 잠자리에 누웠지만 쉽게 잠에 들지 못했다. 주무관을 만나 어떤 질문을 던질지 머릿속에 떠올려 봤다. 만약 “피난교회는 유적지로 등록되기 부적합합니다”라는 대답을 들으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막막하기까지 했다.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다음 날 아침, 마승용 목사(성산교회)에게 서귀포시청에 가서 담당 주무관을 만나보겠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자동차 열쇠를 챙기더니 시청까지 태워다주겠다며 함께 길을 나섰다. 서귀포에 볼 일이 있다고는 했지만, 취재를 도와주려는 것임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청사는 높은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었다. 아래로는 태양빛을 받은 서귀포 바다가 보석처럼 반짝였다. 밀려 왔다 빠져나가기를 반복하며 하얀 포말과 함께 일렁이는 파도가 기자의 떨리는 마음 같았다. 이제부터는 내 영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역이라 생각했기 때문일까. 한편으로는 어떤 대답을 들을지 알 수 없어 뒤척였던 지난밤과 달리 오히려 덤덤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숨을 깊게 한번 들이켜고, 문화예술과의 문을 두드렸다.
* 이 기사는 삼육대학교와 삼육서울병원의 지원으로 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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