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적목리 이전의 ‘다목리’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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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근(삼육대 명예박물관장)
재림신앙 대행전(大行傳)의 터전이었던 가평군 ‘적목리’ 이전, 신태식 목사 가족이 살았던 ‘다목리’ 집터가 발굴됐다. 격랑의 세월을 타고 80년이 흐른 뒤다. 신태식 목사 가족이 1943년 9월 그곳을 떠나 적목리 공동체를 형성하고 재림신앙의 불씨를 지킨 뒤 해방과 전쟁, 산업화와 민주화 그리고 지금의 정보화와 선진화 등 격동의 세월이 지난 뒤 마침내 그 역사의 현장을 방문하고 확인했다.
필자는 지난 6월 신태식 목사의 차남 신우균 목사가 한국에서 돌아가시고, 장례식 차 고국을 방문했던 유족들과 다목리를 찾아 나섰지만 뜻을 이룰 수 없었다. 당시는 수풀이 너무 우거져 접근이 어려웠던 탓이다. 하지만 지난달 26일 다시 현장을 답사하고, 집터 등 생존 당시 거주 흔적 등을 찾았다.
이로써 한국 재림교회 선구자 반내현 목사와 함께 신태식 목사가 시작했던 위대한 재림신앙의 불씨를 지킨 적목리 이전의 ‘다목리’라는 공간이 재림교회 공동체에 알려지게 됐다.
■ 적목리와 다목리
화천산과 대성산 산자락에 위치한 다목리는 행정구역상 강원도 화천군 상서면에 소재해 있다. 작가 이외수 선생의 감성마을 주변이다. 적목리는 붉을 주(朱), 나무 목(木)자를 쓴 동명 주목리(朱木里)에서 적목리(赤木里)로 쓰게 되어 ‘붉은 나무골’이라는 뜻이다. 특히 주목은 느리게 성장하고 수명이 매우 긴 나무로 알려져 있고,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이라는 말처럼 활용도가 많고 몸에 좋은 식물이다. 관상용이나 목재, 항암 효과가 있는 약재나 차(茶) 등의 식용, 공기 정화와 토양 보호 및 조림용 등 다양하게 사용된다.
다목리는 ’나무가 많은 동네‘라는 이름이다. 옛날 임금의 관을 만드는데 쓰는 나무인, 소나무의 한 종류인 황장목(黃腸木)이 울창해서, 나라에서 벌목을 금지/ 금양(禁養) 했지만 나무를 베어내도 표가 나지 않을 만큼 빽빽한 동네다. 황장목은 껍질이 붉고 속이 누런색을 띠며, 곧게 자라기 때문에 목재로서의 가치가 높다. 목질이 단단하고 윤기가 나며, 벌레가 먹지 않아 황금빛처럼 보인다고 하여 그렇게 불렀다.
■ 답사 과정
이번 답사는 지난 6월 고인이 된 신우균 목사, 문정자 사모의 장녀 신현숙 집사가 그 시대를 살았던 고모 신선옥 집사(신태식 목사의 넷째 딸이자 신우균 목사 누나, 90세)와 함께 방한해 11월 26일 이뤄졌다. 신태식 목사의 외손 강충숙 집사(신태식 목사의 둘째 딸 신선희 집사의 딸), 엄기경 집사(셋째 딸 신선영 집사의 딸)와 남편 최익종 장로(북아태지회 대총회 감사 퇴임) 그리고 신우균 목사의 한국 유족 대표인 문정희 장로, 그리고 장석 목사가 동행했다.
최 장로의 주선으로 다목리 노인회장 박승래 옹과 일제강점기 금과 은을 채취했던 황우광산 근로자 고 김병학 씨의 자제인 김영로 옹이 주민센터에서 합류했다. 현지인들의 안내로 신태식 목사의 집터와 광산 옛터를 찾아 나섰다. 먼저 일제강점기 황우광산의 입구가 보이는 건너편 장소에서 위치를 확인했다. 당시 강원도에서 금의 채광량이 제일 많고, 크기가 황소 머리만 하다고 하여 황우(黃牛)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그 후 일행은 지난번 먼발치에서 신태식 목사 가족이 살았다고 지목됐던 옛터를 찾아 나섰다.
집이 있었던 곳은 주변 지역의 산세가 가파른 곳으로 현지에서 나온 주민이나 신선옥 집사 그리고 일행이 한 장소를 지목했다. 그때는 집터였으나 지금은 밭으로 주변이 잘 정리된 장소였다. 신선옥 집사는 집 마당이 널찍했고, 집 앞에 개울과 건너편에 산이 있었다고 언급했다. 강충숙 집사도 모친 신선희 집사로부터 여러 차례 들었던바 집 뒤 돌바위 장독대에는 봄이면 뱀이 많이 나와 무서웠고, 사랑채와 안채가 있는 큰 집이었다고 회고했다. 넓은 마당과 사면 울타리가 있어 대문을 통해 드나들었다. 그 시절 생활상에 비교하면 부유했고, 뒷 산길로 올라가는 언덕길에는 고사리 등 많은 산나물이 있어 그것을 자주 뜯어 먹었다고 했다.
개울 건너편 산기슭과 골짜기에는 여름이면 머루와 다래가 많이 맺혀, 신 집사 남매들이 올라가 따 먹다가 자주 넘어지기도 했다. 특히 문정희 장로의 제안으로 뒷 산길로 올라가 각 증언들이 일치하는 집터와 주변을 확인하기에 이르렀다. 다목리는 특히 휴전선 인근 지역으로 자연 그대로 보존되고 주변이 잘 정돈돼 있었다. 태백산, 설악산, 지리산의 재림신앙공동체를 답사하는 데는 지형과 산세가 크게 바뀌어 적어도 온종일 고생했던 것과는 달리, 다목리는 비교적 쉽게 터전을 조사하고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였다. 일행은 너무도 기뻐 그 집터에서 감사기도를 드렸다.
■ 금광 입구
이어 80년 전, 신태식 목사의 일터였던 황우광산 입구를 찾아 나섰다. 그때 10세였던 신선옥 집사는 동생 신우균 목사를 데리고 집터 아래쪽 광산 입구에서 놀았다고 했다. 노인회장의 안내로 사람 키보다 더 자란 숲을 헤치고 길을 만들어 금광 입구에 도착했다. 신선옥 집사는 동생을 데리고, 바로 그 광산 입구에 와서 놀면 어른들이 나와서 다른 곳으로 가라고 야단쳤다고 했다. 또한 동생과 함께 금붙이가 장갑에 싸여 튀어나온 것을 주어 아버지께 가져다주었던 이야기 등을 증언했다. 신우균 목사의 자서전 <아버지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에 나오는 내용과 일치한다.
일제강점기 수탈의 현장인 황우광산 입구를 찾게 되니 얼마나 놀라운 순간이었던지! 일제가 떠난 뒤로 광산은 폐광돼 입구에 물이 차 더 이상 들어갈 수가 없었다. 이로써 신태식 목사의 집터, 앞마당의 넓은 터, 집 아래 광산 입구, 앞에 흐르는 개울 그리고 앞산 등 다목리 재림신앙 가족과 관련된 주요 공간이 드러나게 됐다.
■ 다목리 출발
당시 신태식 목사는 50명~250명의 인부를 거느린 거대 목상(木商)이었다. 광산의 갱도를 받침목으로 밭치고 채광했기 때문이다. 황우광산은 강원도에서 당시 제일 큰 광산으로 채광량이 많아 그렇게도 많은 인부가 필요했다. 신태식 목사는 지방 유지로 아래 네 동생(태복, 태흥, 태섭, 태범)이 강제징병과 집용으로 일제의 침략전쟁에서 산화될 대상이었고, 딸 신선희와 신선영이 모두 정신대에 끌려갈 꽃다운 나이였기 때문에, 동네에서 약 오리나 떨어진 외 딴 곳에서 가슴 조이며 살았다(아버지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26-27).
특히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면 일본말을 배워야 하고, 신사참배를 해야 하기 때문에 일본 교육을 거부하고, 집에서 성경과 예언의 신 내용을 칠판 가득히 적고 매를 갖다 놓고 한글을 가르쳤다. 안방에서 언제나 칠판에 가득 기록한 것을 다 배운 뒤, 그것을 지은 후 뒷문밖에 두고 잤는데 그날따라 지우지 않고 그냥 두었다. 이튿날 일본 순사 2명이 한국인 순사 1명을 데리고 아무 예고도 없이 들이닥쳐 집안을 샅샅이 뒤지고 조사했다. 가족들은 모두 잡혀갈 것을 두려워하고 순간 절망했지만, 한국인 순사가 별것 아니라고 변호해 주어 위기를 간신히 넘겼다.
물론 가족 호구조사를 하고 갔기 때문에, 불원장래 곧 다시 덮칠 것을 예상하고 떠날 준비로 미숫가루와 찹쌀을 볶아 준비하고 있었다. 어느 날 드디어 일제와 친한 김수환 동네 이장이 일경의 급습 계획을 귀띔해 주었다. 그 즉시 부엌살림이나 가구, 책상과 옷가지 등 모든 세간살이 일체를 두고 미숫가루를 준비해 몸만 황급히 빠져나왔다. 정말 숨 막히는 공포의 순간이었다. 그때 어린애들을 잘 따르던 ’나찌‘라는 개가 개울까지 내려와 더이상 따라오지 못하고 낑낑대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고 신우균 목사는 회고했었다.
모든 가족이 어깨와 옆구리에 미숫가루를 매달고 발이 부르트고 터져 쓰리도록, 몇 곳을 들러 걷고 또 걸어 도착한 곳이 바로 가평군 북면 하늘 아래 첫 동네라고 불려졌던 심산계곡의 적목리였다. 온 가족에게 재앙이 될 일경의 체포를 겨우 간신히 피해 신태식 목사 가족은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히 11:38)하며, 재림신앙의 불씨를 지켰다. 재림신앙 선구자들의 다목리 역사는 재림신앙의 소중함과 희생을 일깨우는 귀한 자료이다. 필자는 이 현장 답사와 기록이 후대에게 매우 의미 있는 교훈을 전달하는 중요 자료로 기억될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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